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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 3회차 발제문 <불안한 사냥꾼의 사회>

사회 체계의 불안과 그로 인해 생기는 불신, 분노, 혐오가 어떻게 작용하고, 어떻게 혐오를 재생산 하는지 알아보고 그 혐오의 운동에서도 직면 해야 하는 문제는 무엇인지 책을 통해 함께 살펴보자

1. 불안을 공유하는 나라

우리는 사냥터에 산다.
사회학자 하인츠 부데는 ‘불안’을 현대사회 누구나 안고 있는 보편적 문제로 꼽는다.
추락에대한 염려, 경쟁 사회에서 제거 될 수 있다는 불안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왜 불안할까? 불안은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본성에만 기대어 설명하기에 무리가 있다.
역사의 국면이 고형적 단계에서 유동적 단계로 바뀌었다.
세상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던 사회 구조와 제도가 사라지고 있고, 국민 국가의 권력은 약화되고, 정치는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개인의 실패나 불행을 보호했던 장치가 사라지고 있다.(예를 들어 과거에 대학만 졸업하면 자동적으로 취업하던 시절에서 졸업을 해도 취업이 불분명한 유동적 단계로 가고 있다.)
급속한 정보화와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유연성으로 귀결되는 변화가 일어났고, 개인이 어떤 선택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은 선택에 따른 위험을 감수할 의무도 개인에게 있다는 뜻이다.(9-10p)
그래서 오늘날 생존을 위해 ‘사냥꾼’이 되었다. (10p)
근대 이전 = 사냥터지기의 자세(사냥꾼의 침입을 막아 자연의 균형을 지키는 사람)
근대 = 정원사의 자세(설계도에 따라 정원에 적합한 식물을 심고 잡초를 뽑는 정해진 틀을 강요하는 사람)
사냥꾼의 관심 = 자연의 균형도 아니고 잘 고안된 정원의 디자인도 아니다. 오로지 자루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사냥감을 죽이는 것에만 신경 쓴다.
불안은 타인을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 오는 불만과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지금 한국은 불안이 사회 갈등을 낳고, 이로 인한 분노가 다시 타인에 대한 혐오를 생산하는 고위험 사회의 징후를 보인다.(16p)
Q. 나의 주변에 있는 분노와 혐오는 어떤 것이 있나요? 그리고 그 분노와 혐오는 어떤 불안으로부터 왔나요?
한국 사회에서도 불안이 우울감과 무력감, 불만과 불신을 넘어 분노와 혐오로 왜곡되어 전이되고 있다. 언제나 누구든 차별하고 배제하고 박탈할 준비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모멸과 비하의 정서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다.(17p)

2. 표적이 되는 사람들

혐오는 기성의 질서를 강화하는 규칙이다. 변칙적인 것이 위험한 것으로 낙인 찍히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경계선을 위반하지 않고 순응하는 존재가 된다.
혐오의 시작이 되는 ‘구별짓기’는 지배의 한 방식이다. 우리를 그들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만들어야 자원 독점, 지위 획득, 위험 회피와 같은 우리 집단의 이익을 유지하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나치 유대인 학살)
반대로 아웃사이더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억제했다.
이러한 ‘구별짓기’ 또는 ‘경계’는 주로 인접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예: 흑인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 전통적 부자와 벼락부자)
혐오의 대상인 마이너리티
자기 집단이 무시 당하거나 저평가된다고 느낄 떄,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외집단 폄하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기호의 문제를 우열의 문제로 생각하고 차별한다.
수치심을 회복하고 치유하기 위해 타자에게 보복하고, 자신의 우월한 정체성을 억지로 되찾으려 한다.
수치심이 들게 한 근본적인 문제인 사회 구조를 비판하기 보다 그 안에서 수치심 감소를 위해 타 집단을 혐오하고 비판하는 상황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수치심과 분노의 운동이 또 다른 운동을 낳고 있는 악순환이 이루어진다.
Q. 우리는 이러한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치심과 분노의 운동은 또 다른 운동을 낳는다는 것이다. 청년 세대의 분노는 여성 혐오를 주장하는 정치 운동으로 전환되고, 또 이에 대응해 남성 혐오를 주장하는 정치 운동이 생겨난다.(44p)

3. 평범한 얼굴의 혐오

한국 사회에 작동하는 혐오의 결과들이 나오는 장이다.
태극기 집회에 나온 극우 세력의 분노는 자신들이 희생을 통해 이룩한 과거가 부정당하고, 현재까지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분노의 운동에 도덕과 종교라는 가치를 동원하여 강화하는 현상도 존재한다. 그 현상으로 교회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인 동시에 반공 기지 역할을 했던 현상도 있다.
젠더 갈등은 청년들이 안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4. 고위험 에너지의 재배치

혐오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사실 세대나 성별 집단의 일부다. 무대 위에서는 남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연기하고, 뒤에서는 소극적이고 무력한 자신을 드러낸다.
유동하는 사회에서 통제감을 상실한 청년이 자신의 삶의 지배자가 되는 도전을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과제이다.
빈부 격차의 갈등은 상층 노인과 흙수저 청년 사이의 분배를 두고 이루어지는 문제이지만 분노의 운동이 이루어지는 관계는 하층 노인(연금충, 틀딱충이라고 불리는)과 흙수저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불평등과 불안이 중첩된 현실 속에서 인정 투쟁은 세대 간의 단절과 혐오로 번진다.
대안으로 저자는 저항적 사회 참여를 위해서는 다수 개인의 사심 없는 협동인 신뢰가 필요하다 이야기한다.
개인 수준에서 불안의 처리 방식은 대부분 본질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므로 유사한 감정을 내재한 사람들과 서로 결합하거나 반목하며 사회 균열을 촉진한다.
인정 정의와 분배 문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경제 구조에서 기인하는 불평등의 문제를 간과한 채 문화 다양성과 차이의 문제에만 골몰하는 것은 편협한 태도다.
Q.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불안을 어떻게 건강한 방식으로 처리해야 할까?
집단적으로 혐오 운동을 실천하는 이들과 달리 대다수의 불안한 사람들은 스펙 쌓기에 몰두하거나 자책과 고립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분리된다. 고립은 사회적 의미의 상실로 인한 우울과 자기혐오라는 또 다른 부정적 에너지로 축적될 수 있다.(84p)
개인 수준에서 불안의 처리 방식은 대부분 본질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므로 유사한 감정을 내재한 사람들과 서로 결합하거나 반목하며 사회 균열을 촉진한다.(84p)

5. 존중 사회를 향한 첫걸음

불안이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혐오와 차별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저자의 해법은 혐오 운동의 요구를 살피는 것이다.
과격한 혐오 뒤에는 양극화와 학력주의, 사회적 안정망의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 표현이 아니라 메시지에 귀 기울이면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Q. 가장 눈에 들어오는 혐오의 운동은 무엇이고, 그 이면에 있는 사회의 문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