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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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름 : 작은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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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레에다 히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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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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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류 : 외국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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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연도 : 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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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 264쪽
리뷰
최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이 나왔다. 그의 전작인 영화 <어느 가족>, <세 번째 살인>,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진짜로 일어날지 몰라 기적>, <걸어도 걸어도>을 봤었고, 도서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걷는 듯 천천히>도 재밌게 봤다. 다큐멘터리, TV 감독으로서 시선과 사회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는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걷는 듯 천천히>가 합쳐진 느낌(?)이 들어 읽었던 내용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히로카즈 감독의 특유의 매정함, 리얼리즘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인간을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설정해 공감하게 만든다. <걸어도 걸어도>의 키키 키린의 캐릭터가 압권이었다. 상처받은 한 인간의 악함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아이들에게 연기 코칭하는 것도 매우 독특하다. 아이들 본연의 감정과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히로카즈 감독의 연기론은 신선하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제목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봤는데, 그의 문장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국가’나 ‘국익’이라는 ‘큰 이야기’로 회수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영화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큰 이야기’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다양한 ‘작은 이야기’로 계속 내놓는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해왔다.”(25p) 그의 영화와 자전적 에세이를 읽다보면, 그는 사회적 이슈에 자신의 영화로 응답했고, 그 방식은 작은 자들의 이야기였다. 일본 사회의 가족의 해체, 종교 문제 등 시대를 자기만의 작은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자기 방식이자 한 명의 시민으로서 윤리임을 알 수 있다.
나만의 방식으로 사회문제에 반응한다는 건 무엇일까. 일본사회가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의 범위를 매번 재설정한다. 감독의 애착하는 문제를 바라보며, 나는 무엇을 계속 나만의 것으로 담아야 하는지 되묻는다.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보다 결국 ‘무엇을 찍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의 여운이 아직까지 내 가슴에 남은 이유다.
인상 깊은 문장
이번에 내가 말한 것은 ‘공동체’의 변화에 대해서였다. 일본은 지역 공동체가 붕괴되고, 기업 공동체가 붕괴되고, 가족 공동체도 3세대 가족이 1세대 가족으로 변했으며 1인 가구도 급격히 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묘사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세 공동체, 즉 ‘지역’ ‘기업’ ‘가족’에서 떨어져 나왔거나 배제되어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된 사람들이다. 이것이 이야기의 내측이다. 고립된 사람이 찾는 공동체 중 하나가 인터넷 공간이고, 그 고립된 개개인을 회수한 것이 ‘국가’주의적 가치관이며, 거기서 이야기하는 ‘국익’과 자신의 동일화가 진행되면 사회는 배타적으로 변해 다양성을 잃는다. 범죄는 사회 빈곤이 낳는다는 표면적 담론이 뒤로 물러나고 본인의 책임이라는 본심이 세계를 뒤덮는다. 18p
그러나 23년 사이에 깨달은 건 영화를 찍는 것, 그리고 영화제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나만 안전지대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다는 건 어리광 섞인 오해이며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영화제는 나라는 존재가 자명하게 휘감고 있는 ‘정치성’을 표면화하는 공간이다. 눈을 돌리든 입을 다물든, 아니 그 ‘돌리고’ ‘다무는’ 행위 자체도 정치성과 함께 판단된다. 하지만 이는 물론 영화감독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에 참여하는 사람이 원래 지니고 있는 ‘정치성’일 뿐이다. …… 나는 사람들이 ‘국가’나 ‘국익’이라는 ‘큰 이야기’로 회수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영화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큰 이야기’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다양한 ‘작은 이야기’로 계속 내놓는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해왔다. 24-25p
작품을 메시지를 옮겨 나르는 그릇으로만 보는 태도에서는 작품을 매개로 풍성한 커뮤니케이션이 확산되는 일은 아마 바랄 수 없을 것이다. …… 반대로 사회나 정치 상황의 ‘참혹함’만을 드러내려고 의도한 작품 역시 ‘빈곤 포르노’라는 말로 비판을 면치 못한다. …… 영상은 감독의 의도를 초월해 눈치재지 못한 형태로 ‘찍혀버린 것’ 쪽이 메시지보다 훨씬 풍성하고 본질적이라는 점을 나는 실감하고 있다. 26-27p
예술도 ‘문화’라면, 이들은 결코 ‘정치’의 종이 아닙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문화를 이용하는 것을 외교라 부른다면, 그런 것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34p
그리고 영화를 또 하나의 측면인 ‘문화’로 볼 경우,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영화가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영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요컨대 ‘국익’이나 저의 이익보다 ‘영화의 이익’을 우선하는 가치관이죠. 이야말로 영화를 문화로 여기는 일입니다. 36p
이 작품을 본 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감상을 가질지에 대해 저는 일절 책임질 생각이 없습니다. ‘책임질 수 있다’고 하는 창작자가 있다면 그쪽이 훨씬 위험하며 오만하겠지요. …… 반대로 가령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백 명이면 백 명 다 ‘아동 방치는 잘못됐다. 내버려두면 아이는 큰일 난다’라고 동일한 감상밖에 가지지 않는다면, 그건 아주 징그러운 일 아닌가요? 43p
미디어 종사자들에게 지금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정의감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 속에서 스스로를 보려는 자세일 것이다. ‘대체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 이 물음을, 옴진리교를 낳은 지금의 일본 사호를 다시 생각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미디어는 바로 그 사유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 영상 제작자는 시청자에게 그런 사유를 요구하기 앞서, 먼저 스스로 거울을 앞두고 철저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교단도, 미디어도, 사회도, 감동보다 사유를 추구하는 냉철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개혁도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50p
그런데 저는 ‘말하기’보다 ‘듣기’가 훨씬 어려운 행위라는 것을 최근 들어 깨달ᄋᆞᆻ습니다. 듣는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만약 상대가 없었다면 혼잣말(모놀로그) 혹은 말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 대화(다이얼로그)가 됩니다. “아……” 하는 맞장구 하나로 풍성한 커뮤니케티션으로 변합니다. 토론이란 ‘말하는’ 기술을 겨루는 일이겠지만, 뭔가 그것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평가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듣기’라는 행위, ‘상대의 마음이나 생각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지금 사람들이 가장 잃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분명 저는 ‘자기표현’이라는 말에서 모놀로그적인 ‘일방통행’의 냄새를 감지하는 거셌지요. 58p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철저하게 상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테면 제가 쓰는 ‘희망’이라는 말과 상대가 쓰는 ‘희망’이라는 말이 과연 같은 의미인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다릅니다. 거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인생을 걸어왔고 상이한 가치관으로 살았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다르다’는 것이 대전제이고, 그 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모색해 나갑니다. 작품화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눈앞의 타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언어와 세계관으로 상대까지 덮어버리지는 않았나, 즉 자기표현의 부품으로서 적절한 코멘트만 잘라내어 이쪽 세계에 봉사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88-89p
영화 속에서 저는 결여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가능성이라고, 배두나라는 존재를 통해 소리 높여 선언했습니다. 144p
그런 저와 관계 깊은 생활까지 포함해서, 지금 제가 직면해 있는 건 ‘아버지가 된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문제입니다. 다음에 만들 영화는 거기서부터 시작해보려 합니다. 다 그런 건 물론 아니지만, 어머니는 자식이 태어난 순간부터 어머니인 듯한데, 아버지는 자식에 대해 무언가를 획득해나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될 수 없는 느낌이 듭니다. 그 획득의 방식이나 아이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남자가 날 대부터 알고 있는 게 아니구나 하고 실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신이 없을 뿐일 수도 있지만요. ‘완전히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느낌이 저에게는 아주 생생합니다. 159p
사실은 어디에나 있지만 진실이 어디에 있느냐, 라는 질문은 까다로운 대답을 요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문제에 다가간 다음 그 문제의 삶 안을 중계하듯이 진행해나간다. …… 고레에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마치 증인처럼 카메라 앞에 서서 증언하는 것만 같은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 등장인물은 처음에는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게 될 때, 그 순간과 마주하게 될 때, 그 등장인물은 드라마처럼 보이는 증언의 과정 안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성숙, 그 말이 너무 크게 들린다면 미처 자신이 알지 못했던 책임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성숙을 경험하게 된다. 202-203p
<공기인형>은 도쿄라는 도시와 거리를 인형의 눈을 빌려 새롭게 발견해가는 영화였습니다. 때문에 일본인이 아니라 외국인 촬영감독의 눈을 빌려서 인형의 눈을 거기에 겹쳐서 보여주자, 그러면 일상적인 도쿄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각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226p
제가 스스로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깨닫게 되는 건 슬퍼하는 것보다 분노하는 게 더 강할 수 있고, 답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훨씬 더 넓어질 수 있다, 확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238-23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