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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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름 : 가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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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코미디, 로맨스, SF,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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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요르고스 란티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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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토니 맥나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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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 엠마 스톤, 마크 러팔로, 윌렘 대포, 라미 유세프, 제러드 카마이클, 크리스토퍼 애벗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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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일 : 2024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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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수상 :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리뷰
96회 미국 아카데미에서 4관왕을 차지하고,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차지한 <가여운 것들>은 2024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충격적인 영화다. 미국 아카데미 상의 상업성과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작품성까지 모두 인정받은 드문 사례가 아닌가 싶다. 감독의 다른 장편영화와 달리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절망과 탐욕의 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를 담은 다른 영화들의 엔딩과 다르게 <가여운 것들>은 한 인간의 성장서사이자 페미니즘 영화로도 읽힌다. 우리는 어떻게 자라나는가. 여성은 지나간 시대에서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
<가여운 것들>의 장르는 ‘드라마’이지만, SF적 요소가 엿보인다. 낯설지만 강렬하게 끌리는 색감의 도시와 배 그리고 열기구와 모노레일이 연결된 이동장치, 뇌를 꺼내 다른 사람의 뇌를 이식하는 행위 등 현실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로 보인다. 벨라가 머무르는 장소도 변하면서 시대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인다. 포르투갈, 그리스, 독일 등 다양한 장소로 이동할 때 마치 여러 시대가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시대극)-현재(드라마)-미래(SF)’적 요소가 버무려져 있기에 벨라라는 캐릭터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류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벨라가 아버지인 갓윈 백스터 집을 떠나기 전, 영화는 색감이 없고 흑백으로 처리된다. 실제 아이가 뇌가 자라기 이전 색깔을 구분하기 어려우며 성장하면서 색감을 인식하는 것을 묘사한다. 색감의 세계는 흑백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선택지를 준다. 색깔의 다양성, 상징성, 감정 등 벨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마주한다. 그는 덩컨 웨더번(마르 러팔로)의 꼬임에 넘어가 리스본부터 알렉산드리아에 이르기까지 함께 여행한다. 벨라는 자기 욕망을 발견한다. 영화는 이를 섹스, 성욕으로 표현하는데, 아마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려왔으리라. 벨라는 자기충족을 위해 끊임없이 섹스와 음식에 몰두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에 기분이 좋으며, ‘하고 싶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고 실행해가는 단계. 그러나 금방 이 세계는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의 귀족세계의 탐욕과 아메리카로 떠났던 대항해 시대를 묘사하는 것만 같다.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해 가난한 자들, 마치 과거의 이집트의 대형제국에서 착취된 이들의 가난함과 허덕임을 발견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경험을 겪는다. 그들에게 향할 수 있는 계단을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으로서 부유함은 절대 그들에게 닿을 수 없다. 닿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사치에 가깝다.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돈을 전달하고자 했으나 그 방법을 모르는 벨라는 절망에 빠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철학을 숙고하며 문학을 읽어간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넘어 타인의 삶,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씨앗과도 같은 질문은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추동력을 얻게 한다. 그 씨앗은 결국 덩컨 웨더번이라는 보호자를 버리고 스스로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들은 파리로 도착하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빈털터리가 된다. 벨라는 자신의 생산수단이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매춘을 시작한다. 마치 프랑스의 파리 혁명 그리고 독일의 68혁명의 시대상에서 그는 몸을 통해 남성들의 욕망을 깨닫는다. 자기의 욕망만을 우선했던 벨라는 타인의 세계를 배우고 관계하는 법을 터득다. <가여운 것들>은 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면서, ‘성’을 다루는 것이 인간 그 자체를 다루는 것으로 묘사한다. <송곳니>, <더 랍스터>,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 성적 묘사를 여실히 묘사한 감독의 방향과 일관된다. 천박하거나 혹은 성스럽거나 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식적이지 않은 존재를 표현한다. 성은 개인만이 소유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이다. 68혁명은 폴리아모리(다중연애)부터 성판매까지 다양한 성의 혁명을 시도했으나, 궁극적인 성공은 이루지 못했고, 실패로 평가된다. 개인의 권리는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연결되어 있으며 벨라는 그 과정에서 타인의 몸, 경계를 경험하고 배워나간다. 동시에 사회주의 모임에 나가면서 사상과 관계를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벨라는 결국 집으로 향한다. 한 남자가 다가와 자신을 남편이라고 소개하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폭력과 전쟁으로 물든 남편에게 벗어서 자살을 시도했던 옛 벨라는 임신한 상태였고, 갓윈은 아이의 뇌(벨라 자녀)를 엄마(벨라)의 뇌와 바꿔 그의 몸(벨라)을 되살린 것이다. 벨라는 자신이자 엄마가 왜 죽었는지 깨닫는다. 폭력은 존재를 삭제시키고, 관계를 공간에서 제거한다. 하인마저도 믿지 못하고 총구를 들이대는 남편의 모습 앞에 벨라는 저항하고 그를 무너뜨린다. 낭만의 시대 이면의 폭력성에서 벗어나 벨라는 다시 집으로 복귀한다. 착취와 폭력을 기반으로 세워진 부유함은 무너지고, 시대의 면면은 밝혀진다.
집을 떠날 때 갓윈은 벨라를 붙잡지 못했다. 이성주의, 과학주의로 대표되는 갓윈(God Win)은 자신의 시대를 스쳐가는 인류를 잡아두지 못한다. 시대는 변화하고 인류는 앞으로 향해간다. 갓윈은 무기력하게 무너지는데, 의사였던 그는 스스로 암을 진단하고 포기한다. 벨라의 남자들, 자신을 통제권 안에 가둬두려 했던 이들, 결혼과 가족이라는 속박 가운데에 묶어두려 했던 이들은 무력해진다. 벨라의 얼굴은 당차고 위엄있는 표정으로 변해가고 그것이 우리 인류의 얼굴이자 여성의 얼굴임이 드러난다. 죽어가는 아버지인 갓윈을 되살리지 않고, 전 남편의 뇌를 염소에게 이식하며, 낭만주의와 이성주의 시대를 모두 벗어나 자기만의 시대로 나아감을 알린다. 벨라의 세계는 새롭게 펼쳐질 것이다. 마치 파라다이스처럼 묘사되는 마지막 공간은 실험체로 소비되는 인간의 몸뚱아리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 펼쳐지고, 타인의 욕망을 배우는 몸들(존재)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수치의 역사 속에 비인간이었던 존재는 인간됨을 획득해낸다. 어떠한 것도 자연스럽게 이뤄낼 수 없다. 가족의 품에서 탈출한 <송곳니>의 여성, 계층을 뛰어넘어 왕의 권력을 얻어낸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여성 등에 이어 남성에게 귀속되지 않고, 자기서사를 써내려가는 존재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