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
책 이름 : 정확한 사랑의 실험
•
저자 : 신형철
•
출판사 : 마음산책
•
종 류 : 한국 에세이, 영화 에세이
•
출판연도 : 2014-10-01
•
쪽수 : 240쪽
리뷰
전에 읽었던 신형철 작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좋았다. 영화, 소설, 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슬픔’, ‘공부’라는 키워드를 연결한, 예술적 시선을 넘어 시대를 읽어내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시대적 참상이 일상인 대한민국에서 예술은 어떤 효용이 있는지, 무엇을 일깨우는지 등을 사유했고, <킬링 디어>를 해석한 서론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에 <정확한 사랑의 실험> 또한 너무 궁금할 수밖에.
문학 평론가인 그는 자신의 영화 평론의 한계를 서론에 던지지만, 문학 평론가다운 평론을 보인다. 영화의 장르론, 편집론 등은 다루지 않고, 서사성, 인물성, 해석학 등을 다루면서 도리어 색다른 평론을 만날 수 있었다. 특별히 ‘사랑’이라는 주제로 관통하는 다양한 영화를 보면서, 사랑의 보편성과 다층성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사랑은 모두가 아는 단어지만, 각각의 영화에서 드러난 사랑은 다른 모양과 모습으로 해석되고 풀이된다. 그것이 영화가 해야 하는 역할이자 몫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가끔 1차원적인 영화 해석을 마주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낀다. 깊이있게 음미하고 해석할 수 있는 짝꿍과 함께 영화를 볼 때 기쁘다. 영화가 끝나고 30분 동안 이야기하면서 이미지를 나의 언어(텍스트)로 다시 정리한다. 반대로 영화 평론집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유를 경험하고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구조, 깊이)를 발견한다. “어떤 텍스트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텍스트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며, 그것이 바로 '해석'이라 불리는 행위의 이상일 것이다.”(118p) 얄팍한 해석은 감독이 전달하는 독특한 체험성을 뭉개는 일이 아니겠는가. 깊이있는 내면적(자기갈등)-공동체적(관계성)-사회적(사회문제) 해석이 더해질 때 감독의 숨겨놓은 의도를 넘어 스스로가 창조자가 된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그러한 창작자의 시도이기도 하다.
<더 헌트>를 보며, 최근 작고한 이선균 배우를 떠올리게 된다. 가장 애정했던 배우의 죽음은 꽤나 나를 괴롭혔고, 서러웠다. “그런데도 저 총성은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진실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이다. 진실로도 설득할 수 없는 것을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타인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에서 이것보다 더 절망적인 결론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네가 누구건, 무엇이 진실이건, 그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가 유죄라는 것이다.’”(131p) 루카스(매즈 미켈슨)가 겪은 총성과 이선균 배우의 언론 플레이는 같은 궤를 했으리라. 신형철 작가의 글을 보며 <더 헌트>와 나의 현실은 교차한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으며 평범한 사랑이 성공하는 이유보단 수없이 사랑이 실패하는 이유를 되묻는다. 때로 이러한 문장을 만날 때, 지나간 내 주위의 사랑이, 내가 본 로맨스 영화의 사랑이 실패한 이유를 마주한다.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20p) 해석은 끝없이 실패의 이유를 찾아내고 보편성을 붙이려 한다. 특별한 경험을 보편적 언어로 해석한다. 그렇게 영화는 특별해질 테다.
인상 깊은 문장
도대체 어떤 구조 속에서 A는 B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그리고 어떤 조건이 갖춰질 때 B는 A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이 두 물음 중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후자다. …… 그러므로 진정 놀라운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상황 혹은 조건 속에서만 타인의 사랑에 기꺼이 응답하는가?’ 18p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20p
쓰네오가 조제를 사랑하는 데 성공할 수 있으려면 조제의 결여(다리)만큼의 결여를 제 안에서 발견했어야 했다. 그러나 쓰네오는 실패했다. 예나 지금이나 쓰네오에게는 ‘없음’이 너무 없는 것이다. 조제의 집을 떠나며 쓰네오가 한발 늦게 오열하는 장면이 그토록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것이 죄지은 자의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실패한 자의 통한의 눈물이기 떄문이다. 죄가 아닌 실패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조제가 쓰네오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를 비난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비난하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더 분명해지는 것이지만, 그녀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였기 때문이다. 조제는 성공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아름다운 힘이다. 23p
기본적인 신뢰가 갖춰져 있는 조건하에서라면, 타인의 결여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4p.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6p
<로렌스 애니웨이>가 로렌스의 성에 취하는 대범한 태도는 곧 성에 대한 이 영화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로렌스 무엇이건’이다. 이 이름은,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길’을 택해서라도 그래야 한다고 말해준다. 31p
두 사람의 차이가 상호 매혹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동일한 차이가 결국 그 관계를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 33p.
그러나 소수자라는 말 자체가 이제는 다수적·전체적인 말이 된 것은 아닌지 따져보기도 전에, 소수자라는 말의 ‘용법’이 너무 진부해져서, 이제 그 말은 로렌스나 아델 같은 아름다운 단독자들이 생명력을 죽여버린다. 소수자, 더 구체적으로는 여장 남자니 레즈비언이니 하는 말에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짧다는 것인데, 우리가 특정한 존재에게 짧은 이름을 붙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폭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단독자의 진실을 폭력 없이 말하고 싶다면 짧은 말에 기대지 말고 더 길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가, 로렌스는 ‘본래 여자로 태어났으므로 여자가 되기를 원하는 남자’라고, 아델은 ‘여자를 사랑할 때만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여자’라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 이 말조차도 너무 짧다. 충분히 길게 말하려면 세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두 감독은 세 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었다. 긴 영화가 윤리적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어떤 진실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최소한의 시간을 요구해오기도 한다. 35p
이것은 소수적 주체성을 재현하는 서사물이 자주 부딪칠 수 있는 장벽이다. 특수를 고집할 때 보편을 잃고 보편을 지향하면 특수를 잃는다는 것 말이다. 36p.
왜 관객들은 영화의 끝에 이르러 이 모든 오해와 파국이 단지 남자의 착시가 낳은 왜상이었을 뿐, 그의 여자는 늘 충실한 연인의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가. 왜 초반부에는 유례없이 활기 넘치던 여성 캐릭터들이 후반부에 이르면 다소간 익숙한 여성상으로 되돌아가면서 결백해지는가. 그리고 왜 그녀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결국 남자들을 용서하게 되는 것일까. 고맙게도 이런 결말은 우리 남성 관객들을 안도하게 한다.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게 되고 모르는 게 나을 사랑의 위험한 진실을 피해 가는 데 성공하지 않는가. 45p.
질 나쁜 연애소설은 연애에서 생긴 문제를 다른 연애(또 다른 타자, 반복되는 환상)로 봉합하지만, 괜찮은 연애소설은 같은 문제를 이렇게 자기 발견(또 다른 나, 성숙한 환멸)의 형식으로 해결한다. 46p.
에바가 케빈을 출산하는 장면에서 린 램지 감독은 영상을 일그러뜨려서 피사체가 흡사 괴물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 화면에 찍힌 것이 침대에 누운 에바인지 자궁 밖으로 나오고 있는 케빈인지 나는 모른다. 두 사람 중 하나가 괴물인 것이 아니라, 둘 중 누구도 원하지 않은 그 관계 자체에 ‘괴물성’이 있지는 않은가. 본래 괴물이 아니었으나 둘이 만나서 함께 괴물을 탄생시킨.. 49p
엄마는 언제든 이국의 땅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케빈에게 자신이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할 뿐이다. (뒤에 둘이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케빈이 에바가 틀어놓은 제3세계 음악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먼 이국의 땅을 생각하게 하는 그 음악은 엄마의 꿈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케빈에게 암시했을 것이다) 케빈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하나뿐이다. 엄마가 떠날 수 없게, 그 세계를 파괴하는 것. 그리고 케빈은 그 일을 한다. 51p
그것은 자신이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뎌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받지 못하는 게 당연한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비참한 아들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엄마에게 지독하게 구는 나쁜 아들이 되는 것이 더 견딜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52-53p.
이 영화는 여기에 괴물이 있다면 둘 중 누가 괴물이냐고 묻고, 누가 괴물인지 결정하기가 불가능하다면 어느 누구도 괴물이 아니라고 답한다. 이것은 그저 서로를 ‘정상적으로’ 사랑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덜 사랑했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너무 사랑했다.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둘은 노력했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척했고,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척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국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둘 모두를 기소하는 데 실패한다. 단지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케빈을 소시오패스 살인마로 에바를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나쁜 엄마로 기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두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이 이야기 내부에 있으며, 일단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는 한, 누구도 법적 판단 혹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휘두를 수 없게 된다. 기소에 정확한 방식으로 실패하는 것이 좋은 서사의 목표라면, 이 영화는 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56p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65p.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뒤에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다시 몇 겹의 막을 걷어내고 나면 애초의 물음은 사실상 '나는 타인이 욕망할 만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96p.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 대상에 쏟았던 에너지(리비도)를 철회하여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라면(그래서 '애도 작업'이나 '애도 기간' 같은 말이 성립될 수 있다), 우울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그 대상과 동일시하면서 자기 파괴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다(그래서 애도와 달리 우울은 병리적인 현상이며 치료의 대상이 된다). 103p.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 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특별할 것도 없는 이런 정리를 시도해본 것은 이 세 작업의 몫을 혼동하거나 작업의 단계를 무시하는 사례들이 더러 있어서다. 예컨대 밝혀지지 않은 사실 관계 앞에서 고된 실증 작업을 생략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공백을 메우거나(주석을 텍스트로 대체하는 경우), 지난한 해석의 노동을 건너뛰고 신속히 텍스르로 분류한 다음 그것으로 해석이 완료됐다고 믿거나(해석을 배치로 대체하는 경우) 하는 일들 말이다. 113-114p.
어떤 텍스트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텍스트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며, 그것이 바로 '해석'이라 불리는 행위의 이상일 것이다. 특히 그 텍스트가 타인의 불행을 다룬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타인의 불행을 놓고 이론과 개념으로 왈가왈부하는 일이 드물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 중 하나는 그 불행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쉽게 분류되어 잊히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다. 118p
(필 멀런의 <프로이트와 거짓기억증후군>에 따르면, 정신 치료나 상담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성추행을 ‘기억’해내는 이 기이한 증상은 1990년 초반부터 보고되기 시작했다. 125p
선한 인간들의 집합적 이성이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가는 ‘합리적 부조리’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바닥없는 벼랑을 바라보는 막막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성은 때로 방황할지언정 끝내 빛의 출구를 찾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이성의 오작동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을 막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깨달음이 들어선다. 127p
그런데도 저 총성은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진실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이다. 진실로도 설득할 수 없는 것을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타인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에서 이것보다 더 절망적인 결론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네가 누구건, 무엇이 진실이건, 그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가 유죄라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어쩔 수 없이 또 카프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었던가. 인간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소되기도 한다는 것.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그 재판은 영원히 끝나기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이것은 시작되는 순간 반드시 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재판이라는 것. 이것이 그야말로 부조리한 전언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카프카적 세계에는 진실이라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 영화의 마지막 총성이 알려준다. 131p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133p.
윤리학적인 의제를 활성화시키는 효과적인 서사 구조를 창조해내는 능력을 나는 '윤리학적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내가 보기에 '윤리학적 상상력'은 다음 세 가지 요소를 서사 내부에서 절합해내는 능력이다. 사건, 진실, 그리고 응답. 첫째,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존재론적 단절의 계기로서의 사건이 발생한다. 둘째, 주체가 미처 그 의미를 확정할 수 없었던 사건의 진실이 뒤늦게 밝혀져 주체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셋째, 진실의 압력 속에서 그 진실에 충실하기 위해 주체는 모종의 응답을 시도한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응답이라는 심급이다. 이 단계에서 작가는 세계를 향해 그가 아껴둔 마지막 말을 건넨다. 134p.
시야말로 ‘마음’과 특권적인 관계를 맺는 장르라는, 꽤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 그 관념을 이 영화는 거의 전적으로 수용한다. 시는 마음의 투명한 재현을 추구하는 1인칭의 독백이다. 시에 어떤 화자가 등장하건 그는 곧 시인 자신이다. 그러므로 거짓된 삶에서 진실한 시가 나올 수는 없다. 삶과 시는 일치되어야 한다, 라는 명제들이 그 관념을 구성한다. 136p
가족 로망스: 자신의 친부모는 내 곁에 있는 이 사람이 아니라 다른 고귀한 사람들이라고 간주하며 자신의 혈통을 변경하기 위해 상상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 144p.
프로이트의 개념 중에 '덮개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Decke(덮개)dhk Erinnerung(기억)의 합성어로 '어떤 중요한 기억을 덮기 위한 사소한 기억'을 뜻한다.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을 유독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작 중요하고 본질적인 어떤 기억을 가리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 이 발견의 메시지는 "우리의 기억 작용이 예기치 못한 목적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얼마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잊고 싶은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잊고 싶은 일'이라는 것이 미처 정산이 끝나지 않은 채로 버려진 진실이라면 그것은 언젠가는 다시 되돌아와서 계산을 끝내려 든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소위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146p.
프로이트적인 해석은 모든 사물을 성적 상징으로 변환하는 기술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의 산물인 것처럼 보이는 행위와 사건들에 무의식적인 요소가 얼마나 깊숙이 ‘매개’되어 있는지를 따져보는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국열차>는,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차 그 자체가 주인공인 영화일 수 있지만,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커티스가 주인공인 서사일 것이다. 망ㄹ을 바꾸면, 전자가 이 영화에서 ‘혁명의 서사’를 읽어낼 때, 후자는 ‘아들의 서사’를 읽어낼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들의 서사란 결국 ‘어떻게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 아버지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결 과정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집단의 층위로 옮겨지면서 ‘어떻게 이 집단의 아버지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로 매개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여화는 시작되자마자 길리엄과 에드거가 커티스에게 하는 말을 통해 바로 이 문제가 영화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서둘러 알려준다. ‘네가 리더가 되어야 한다.’ 170p
흔히 이야기의 기본 요소를 인물, 사건, 배경이라고들 한다. 여기서 인물로 번역되는 말의 원어는 person이나 figure가 아니라 character다. 성격이 없으면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어떤 현자의 말마따나 '성격은 곧 운명'이어서, 특정한 성격 안에는 이미 특정한 이야기가 잠재돼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돈키호테와 햄릿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의 제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바로 그들의 이름이다.) 이 잠재적인 것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현행적인 것이 된다. 작가들이 하는 일이란 바로 특정한 성격 안에 잠재돼 있는 이야기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현행화할 수 있는 최상의 상황을 창조하는 일일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인물은 그의 성격이 요구하는 선택들을 하며 그것이 서사의 행로를 결정한다. (가끔 소설가들이, 어떤 지점에서부터는 인물이 스스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과장이 아니다.) 요컨대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특정한 '성격‘이 특정한 '상황'에 던져졌을 때 어떤 특정한 '선택'을 하는지를 지켜보는 작업이다. 196p.
결국 파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과거의 체험을 어떤 식으로건 서사화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저명한 실용주의자 리처드 로티는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자신의 과거를 바로 자신의 언어로 ‘재서술’하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열렬히 강조한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쓸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운명 혹은 신이 쓴 이야기 속의 힘없는 주인공으로서 태평얄 위를 표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과거, 그러니까 누군가에 의해 이미 쓰인 이 이야기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이야기를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이야기도 그 의미가 확정돼 있지는 않기 때문이고 그 덕분에 우리가 그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문학 이론가들은 그와 같은 독서가 작품을 다시 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내가 주인공인 그러나 내가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다시 쓰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그 이야기의 비평가가 되어 그 이야기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길뿐이다. 실용주의의 개념을 빌리자면 그것이 바로 ‘재서술’일 것이다. 파이가 소설가에게 자신이 경험한 일을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줄 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203p
매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존재의 처지가 주인이냐 노예냐 하는 것이 그가 자기 삶에 대해 주인인지 노예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 노예에게 주인인 자가 삶에 대해 노예일 수도 있T고, 주인에게 노예인 자가 삶에 대해 주인일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이렇게 뒤집어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솔로몬 노섭은 12년 동안 노예로 살아본 뒤에야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에드윈 엡스는 그가 한 번도 노예가 되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224p
당연하게도 많은 논점들이 내장돼 있다. 첫째, 장르론적 관점, 판타지 장르의 계보 안에서 이 시리즈는 무엇을 성취했는가? 둘째, 서사론적 관점. 이 서사는 분리, 조정, 통합의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 ‘통과제의’의 모델을 어떻게 활용 혹은 대응했는가? 셋째, 윤리학적 관점, 해리 포터(선)와 볼드모트(악)의 대결을 통해 이 서사는 선과 악에 대한 어떤 특정한 관념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가? 넷째, 이데올로기적 관점, 혈통에 따라 존재를 분류하고 차별하는 인종주의에 대한 이 시리즈의 일관된 비판은 얼마나 유효적절한가? 다섯째, 신학적 관점. ‘마법’이라는 이교도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은 자’ 해리 포터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부활함으로써 공동체를 구원하는 이 서사는 신약의 서서와 얼마만큼 유사한가? 227p
영화 속에서 엉키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매듭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삶의 한 신비를 시각적 어리둥절함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영화 속에서 흐르는 시간이 하나의 의미로 박제되지 않고 충분한 섬세함으로 생포될 때 그것은 이 세상을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 의미들을 제 안에 품고 있는지를 경이롭게 느끼게 한다. 24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