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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리뷰] 틈새 7회차

모임 리뷰

나는 예전부터 반말이 어렵지 않았다. 한두 살 차이나는 형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친해진 일고여덟 살 차이나는 형에게도 반말을 했다. 친밀함은 언어를 간결하게 했고, 나는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직장에서 만난 동료와 직장을 그만두고 난 뒤 관계 맺는 동료에게는 반말하지 않는다. 친밀하지만 사적인 관계가 아닌, 공적인 관계로 만났기에 상대의 경계를 지키고 싶었다. 사회가 부여한 문화, 법칙에 따라 나는 말을 놓는 것과 놓지 않는 것, 그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말 놓을 용기>는 이성민 작가가 디학(디자인학당)에서 평어를 시도하며 축적된 경험의 사유다. 또한 <틈새모임>에서 평어를 쓸 것을 제안하며 함께 읽은 도서다. 실제로 평어를 쓸 것을 생각하며 읽으니 다양한 질문들이 든다. 왜 우리는 이러한 복잡한 존비어체계(저자가 붙인 현 우리 말의 이름)라는 언어를 갖췄을까. 언어는 문화가 축적된 것이자 문화는 상대적이라면, 평어가 존비어체계보다 더 바람직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더 낫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등 여러 질문이 오갔다. 물론 <말 놓을 용기>는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내리는 도서는 절대 아니다.
<말 놓을 용기>는 여섯 개의 챕터로 구성된 아티클 모음이다. 반복되는 내용도 많고, 챕터 간 맥락이 다르지 않고, 편집, 구성, 내용의 수준 등 편차가 있기에 도서라는 장르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다만, 저자가 철학자이며, 평어를 실험하는 모임장이기에 <말 놓을 용기>는 평어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가이드가 아니라 평어를 실험하고 있는 한 철학자의 사유 정도일 것이다. 출판사인 <민음사>는 책의 완성도보다는 책이 가진 사유적 맥락을 더 우선하여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썩 동의되진 않지만 말이다.
저자는 한국어를 존비어체계로 명명한다. “존비어체계를 그냥 존비어라고 부르지 않고 존비어체계라고 부르는 이유는 존댓말과 반말이 결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존비어를 사용하는 한국인은 언제 존댓말을 쓰고 언제 반말을 쓸지 체계적으로 잘 알고 있으며, 이 체계에 익숙하다.” (81p)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체계로 강력하게 작동된다. 한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단어, 높임말로 표현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한편 외국인이나 외국에서 오래 살았던 한국 연예인들은 적절한 존비어를 구사하지 못해 웃음을 선사한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실수에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도서는 묵직한 질문들을 던진다. “상호 적대관계에서 발생하는 전쟁은 서로를 평등하게 만들며, 이 평등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구경꾼들도 인정하는 보편적 평등이다. 싸울 때는 위아래가 없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적대를 통해 생겨나는 평등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 한국인은 부정적 상황에서는 평등에 도착할 줄 알지만, 긍정적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85-86p) 한국은 긍정적인 상황, 우호적인 관계에서 평등의 언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우열과 서열이 다시 작동한다. “이 체계 안에서 우리는 타인을 하대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하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88p)
저자는 평어의 몇 가지 규칙을 공유한다. “평어 이름 호칭을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은 “성민아” 같은 반말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반말과 다른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역시 이름과 관련이 있었는데, 가령 “금방 성민이가 한 말은……”이라고 하지 않고 “금방 성민이 한 말은……”이라고 할 것.” (108p) “나는 멀쩡한 이름을 놓아두고 별명을 사용하는, 전해 들리는 반말 실험들에 찬성하지 않는 편이다. 옆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데 익숙해지면, 바로 그 이름이 말 그대로 ‘고유명’이 된다.” (113p) 조사를 신경 쓸 것. 이름 그대로를 부를 것. 평어는 존비어체계와 다른 또 하나의 체계이다.
“그런데 평어는 그것을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평어만이 아니라 대화 자체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말도 디자인 문제로 볼 수 있듯이, 대화도 디자인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110p) 평어는 언어를 재디자인하면서 동시에 대화 그 자체에 관심을 갖게 한다. 평어를 사용한들 다른 것으로 인해 소통이 막혀 있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평어라는 힙함을 보여주고 싶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언어뿐만 아니라 소통의 과정, 체계도 더 고민해야 하지 않겠나. 침범해 들어올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경계를 드나드는 일. 평어는 낯설지만, 관계를 활짝 열어 즐거움을 줄 것 같다. 그래서 <틈새모임>에서 그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인상 깊은 구절

인상깊은 문장(3개)
반말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배우는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반말을 ‘자연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는데, 그때 배우는 언어가 바로 반말이다. 따라서 반말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아이가 오로지 존댓말만 사용해야 한다. 이것 자체도 힘든 일이겠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즉 부모와 아이가 처음부터 존댓말만 사용한다면, 바로 그 존댓말이 이제 더 이상 존댓말이 아니라 반말이 될 것이다. 자연스러운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게 반말이라면, 그리고 그런 관계에서 늘 존댓말을 사용해 왔다면, 이제 존댓말이 반말이 되는 것이다. 89p
그런데 평어는 그것을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평어만이 아니라 대화 자체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말도 디자인 문제로 볼 수 있듯이, 대화도 디자인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110p
평어는 존비어체계를 보완하거나 우회하거나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그것을 대체하고자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평어 체계는 그 자신 안에 ‘보편성’을 품고 있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문화적이다. 192-193p
인상깊은 문장
한두 살 나이차로도 형, 아우를 따져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 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시 친구나 동료다. 57p
존비어체계를 그냥 존비어라고 부르지 않고 존비어체계라고 부르는 이유는 존댓말과 반말이 결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존비어를 사용하는 한국인은 언제 존댓말을 쓰고 언제 반말을 쓸지 체계적으로 잘 알고 있으며, 이 체계에 익숙하다. 81p
상호 적대관계에서 발생하는 전쟁은 서로를 평등하게 만들며, 이 평등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구경꾼들도 인정하는 보편적 평등이다. 싸울 때는 위아래가 없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적대를 통해 생겨나는 평등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 한국인은 부정적 상황에서는 평등에 도착할 줄 알지만, 긍정적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85-86p
이 체계 안에서 우리는 타인을 하대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하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88p
반말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배우는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반말을 ‘자연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는데, 그때 배우는 언어가 바로 반말이다. 따라서 반말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아이가 오로지 존댓말만 사용해야 한다. 이것 자체도 힘든 일이겠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즉 부모와 아이가 처음부터 존댓말만 사용한다면, 바로 그 존댓말이 이제 더 이상 존댓말이 아니라 반말이 될 것이다. 자연스러운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게 반말이라면, 그리고 그런 관계에서 늘 존댓말을 사용해 왔다면, 이제 존댓말이 반말이 되는 것이다. 89p
내가 나의 적에게 반말(B)를 사용해서 말할 때, 나의 말은 강렬하다. 이 강렬함은 관계의 가까워짐과 무관하지 않다. 90p
사유하는 존재는 말하려는 충동을, 말하는 존재는 사유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다. (한나 아렌트) 98-99p
야자타임은 존비어체계의 폐해를 극복해 보고자 일본 사람이 고안해 낸 방법이라고 한다. “일본인은 중대한 의사결정이 필요한 경우이거나, 강한 일체감을 형성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야자타임을 활용하여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104p
평어 이름 호칭을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은 “성민아” 같은 반말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반말과 다른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역시 이름과 관련이 있었는데, 가령 “금방 성민이가 한 말은……”이라고 하지 않고 “금방 성민이 한 말은……”이라고 할 것. 108p
그런데 평어는 그것을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평어만이 아니라 대화 자체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말도 디자인 문제로 볼 수 있듯이, 대화도 디자인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110p
나는 멀쩡한 이름을 놓아두고 별명을 사용하는, 전해 들리는 반말 실험들에 찬성하지 않는 편이다. 옆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데 익숙해지면, 바로 그 이름이 말 그대로 ‘고유명’이 된다. 113p
손윗사람에게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 예절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평어를 사용할 경우 일상의 삶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은유를 개발하는 일이 보다 쉬워질 것이다. 나는 유머의 경우도 그럴 수 있다고 본다. 117p
어떤 문제를 디자인 문제로 본다는 것의 한 가지 함축은 우리가 겪는 고통이 어떤 것의 존재만이 아니라 부재 때문에도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조적 해결책을 찾는다. 130p
나는 예전에 너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한 적이 있다. “친구가 있기에 우리는 혼자 즐겼던 것을 삶 속에서 즐길 수 있다. ‘나의 것’은 홀로 즐길 때 생기는 게 아니라 친구가 옆에 있을 때 생겨난다. 너가 있어야 나는 비로소 나의 것을 찾는다. 바로 그것이 너의 의미다.” 이제 이와 같은 너의 의미를 지금 주어진 나의 문제에 적용할 때, 너를 찾지 못한 상태가 곧 나를 찾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142p
그런데 우리는 미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본 사자성어를 오랫동안 우리의 것으로 여겨 사용해 왔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편으로 손쉽게 남의 것으로 은유 충동을 해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우리의 새로운 말 은유를 개발하는 일을 미룰 수 있었을 것이다. 168p
평어는 존비어체계를 보완하거나 우회하거나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그것을 대체하고자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평어 체계는 그 자신 안에 ‘보편성’을 품고 있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문화적이다. 192-19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