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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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름 : 숙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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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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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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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연도 : 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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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 224p
리뷰
최근 <숙론>을 읽고 매료된 결과, 자꾸 다른 모임이나 공간에 가서 ‘숙론’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언어를 디자인하라>에서 소개한 리처드 로티의 ‘마지막 어휘’(개인과 집단이 최후까지 의지하는 신념어)를 보면서, 최재천 교수의 ‘숙론’이 그의 마지막 어휘가 아닐까 생각했다.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인으로서 특정한 지식체계에 관한 글이 아닌 지식이란 무엇이며, 그 지식을 어떻게 공유해야 하는지 그의 관점이 인상깊었다. <최재천의 공부>(2022)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먼저 출간된 건 아닐까 싶은데, 결국 지식을 어떻게 다뤄나가야 하는지 질문하는 것 같았다. 2024년 6월에 있던, <서울국제도서전> 부스에 배치된 책을 한 권 집어서 왔는데, 이토록 흥미로운 주제라니!
특정 행사에서 진행하는 ‘토론’ 파트에 참여하면,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자로 불리는 사람이 대화를 독식하거나 자기 생각을 내뱉으며 정답으로 여긴다. 주위의 인물들에게 질문을 돌리지 않고, 자기 생각을 늘어뜨리는 사람을 제지하지 못 한다. 만약 스스로 답이 있다면 관심있는 사람을 모아 강연을 하면 될 텐데,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본 적이 없기에 토론과 강의를 헷갈려한다. 혹은 100분 토론과 같이 전투적인 토론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두려워한다. 의견을 교류하고 질문을 나누며 자그마한 해답을 찾아 나가는 길은 현시점에서 소원해 보인다. 그곳에 ‘숙론’의 자리가 필요하다.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함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17p)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목적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다른지 숙고해보고 자기 생각을 다듬으려고 하는 행위다. 서로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식 수준을 공유 혹은 향상하려 노력하는 작업이다. 숙론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는 과정”(19p)이다.
<숙론>은 그동안 최재천 교수가 살아온 궤적이 갈등과 분쟁의 연속임을 드러낸다. 첨예하게 대립되는 의견과 쉽사리 풀리지 않는 난제 가운데 공동의 지성인은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지 사례와 흥미로운 경험담으로 그 순간 문제를 타파했던 해결책이자 대안을 제시한다. 특별히 그가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자질, 수많은 위원장을 맡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이 인상적이다. 학교 수업이라는 자신의 세계에서는 숙론을 구현화하고, 위원회라는 첨예한 이해당사자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숙론을 기반으로 대화를 이끌어낸다. 누가 그런 말을 했던가. 민주적인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올곧은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숙론 또한 마찬가지다. 방법, 철학, 방향성 등이 구체화되지 않을 시에 숙론은 무용해진다. 리더의 숙론적 사고가 문제 해결 방식과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거기서 최재천 작가는 ‘중재자’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1990년, 몽플뢰르 콘퍼런스를 중재한 애덤 카헤인을 진행중재자로 초대해 숙론 과정을 이끌게 한 과정이 흥미롭다. 남아공이 지닌 다층적인 역사적, 문화적 문제를 다루며 규칙을 제시하고 대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철저하게 지키게 했다. 자유로움은 도리어 대화를 망가뜨리는 원인이 된다. 중재자가 없는 건 마치 그 시간을 방관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화는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이다. ‘상호’를 놓치는 순간 일반적인 전달이 된다. 5부에서는 숙론를 위해 필요한 기술을 서술한다. 특별히 진행자/중재자들에게 필요한 질문의 기술들이 인상깊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질문 앞에 가볍고 편안한 질문을 배치해 시간을 벌어두는 것. “참여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지혜를 보다 많이 이끌어내 주어진 이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공감대를 넓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188p) 숙론의 목적을 잊지 않는 것. “숙론이 생각만큼 잘 굴러가지 않으면 무조건 작은 모둠으로 쪼개는”(194p) 헤쳐모여 숙론은 유연한 사고와 깊이있는 논의로 이어진다.
독서모임을 하다보면, 숙론이 잘 이뤄질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다. 깊이있게 대화하다가도 깊이감을 끝까지 채우지 못하고, 구성원 각자의 세계로 빠진다.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가운데 놓여있는 논의점을 해석하다보니 그 간극이 벌어진다. 우리는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전히 모른다. 나 또한 이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철저히 되돌아봐야 한다. 긴 세월 동안 쌓여왔던 최재천 작가의 노하우를 단 한 번에 배워나갈 수는 없겠지만 그에게 빚을 진 것은 분명하다. 숙론이라는 단어, 숙론의 기술/태도, 최재천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나는 꼭 기억할 것이다.
인상 깊은 구절
우리 역사에 토론 문화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의 군왕이 신하들과 함께한 공부 모임이었던 경연은 임금이 신하들 가운데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을 불러 경전과 사서 등을 강론하게 하여 학문을 닦는 목적도 있었지만, 세상 물정과 민심도 파악하고 제도와 정책을 토론하는 기회로 활용되기도 했다. 주입식 경전 풀이가 끝나면 임금이 경전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신하들과 토론을 벌이는 게 경연의 핵심이었다. 종종 하루에 세 번씩이나 당대의 석학들과 경연을 벌여야 했던 조선의 군왕들은 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 치열함이 조선 왕조를 1392년부터 1910년까지 무려 518년 동안이나 이어지도록 지켜낸 힘이었다고 본다. 13p
지금 우리가 주로 하는 행위는 discussion이 아니라 debate에 가깝다. Debate는 주로 ‘논쟁’이라고 번역하지만 우리는 지금 논쟁 수준에도 못 미치는 ‘언쟁’, 즉 치졸한 말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중략) ‘의’가 다분히 하향식인데 반해 ‘논’은 상향식이라 훨씬 민주적이다. 사실 문제는 ‘토’에 있다. ‘칠 토’자는 ‘공격하다’와 ‘두들겨 패다’에서 ‘비난하다’와 ‘정벌하다’라는 의미까지 품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토론해온 셈이다. (중략) 이런 연유로 나는 기왕에 너무 많이 오염된 용어인 ‘토론’ 대신 ‘숙의’ 또는 ‘숙론’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함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뜻하는 말로 개인적으로 숙론이 더 마음에 든다. 굳이 이에 상응하는 영어 표현을 찾으라면 나는 ‘discoures’를 제안하고 싶다. 영어권에서는 discoures는 dialogue(담화)나 discussion(토론)의 좀 있어 보이는 표현으로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토론(serious discussion)을 의미한다. 17p
숙론은 상대를 제압하는 목적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다른지 숙고해보고 자기 생각을 다듬으려고 하는 행위다. 서로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식 수준을 공유 혹은 향상하려 노력하는 작업이다. 숙론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는 과정이다. 19p
토론의 꽃이 만개할 날을 대비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토론을 이끌 진행자를 양성해야 한다. 토론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책은 차고 넘친다. 나는 좀 다른 각도의 책을 쓰기로 했다. 지금은 토론을 잘 이끄는 방법에 관한 책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탁월한 사회자 혹은 진행중재자가 훌륭한 토론자를 길러낸다. 22-23p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면에 갈등 요소가 존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두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다. 갈등이 수면 아래 가라앉기보다 세상에 드러나고 있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선진화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33p
같은 무리에 속한 동물들 중에서도 오지랖을 주체하지 못하거나 툭 하면 남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개체들이 있는가 하면, 되도록 집단 대부분이 가담하기 전에는 나서길 꺼려하고 늘 하던 대로 행동할 뿐 새로운 도전을 즐기지 않는, 말하자면 보수적 성향의 개체들이 있다. 최근 동물행동학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는 주제가 바로 이런 속성, 즉 개성이다. (중략) 이제는 인간과 가까운 침팬지나 오랑우탄 같은 영장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진딧물같이 언뜻 하찮아 보이는 곤충들도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다는 연구가 속속 보도되고 있다. 동물 사회라고 해서 변화를 불편해하는 보수적 개체들과 개혁을 즐기는 진보적 개체들이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34-35p
좌파나 우파 혹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말은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789년 혁명이 끝나고 소집된 국민의회에서 의장석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공화파가 앉고 오른쪽에 왕당파가 앉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35p
한 개인을 흑백으로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처사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보수와 진보의 긴 연속선 위 어딘가에 놓인다. 그것도 모든 이슈에 있어서 정확하게 늘 동일한 지점에 있지 않고 이슈마다 연속선상 위치가 달라진다. 흑색과 백색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음영의 회색이 무궁무진하게 존재한다. (중략) 그렇다면 지금이 우리나라 민주제 역사에서 이념적으로 가장 분열된 때일까 전 아산정책연구원장 함재봉 박사의 근저 <한국 사람 만들기 1>에 따르면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반도에는 ‘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 등 다섯 가지의 정치 정체성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각축적은 벌인다. 37p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계단은 하류층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상류층의 높이를 상징한다. 상류층과 하류층은 우선 냄새로 구별되며, 하늘에서 어디든 골고루 뿌리는 비도 상류층은 감상하며 즐기지만 하류층은 감당해야 하는 재앙이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간극은 존재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확인된다. 상류층은 하류층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한다. 대한민국 사회의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계급의 대물림은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46p
저출생과 고령화가 불러올 세대 단절과 갈등이다. 앞에서 다룬 남녀 갈등은 때로 엄청나게 심각해질 수 있으나 종국에는 해소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남녀 사이에는 본능적인 끌림이 있어 어떻게든 화합의 길을 모색하기 마련이지만 세대 갈등은 영원히 평행선을 긋거나 점점 더 벌어져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 53p
2018년 12월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제24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그는 주류 정치인들과 기득권층을 향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당신들은 자녀를 가장 사랑한다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음으로써 자녀의 미래를 훔치고 있습니다.” 55-56p
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경제성과 생태성의 평형을 모색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경제적 타당성을 의미하는 ‘경제성’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늘 쓰고 살지만 ‘생태성’은 다소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에서 경제성의 개념이 나왔듯이 생태학도 ‘생태계의 온전한 정도’, 즉 생태성을 측정하고 분석할 수 있다. 경제학과 생태학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Eco’는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57-58p
모든 유전적 형질의 분포는 대체로 정규분포를 나타낸다. 정규분포를 시각적으로 설명하면 가운데 평균 근처에 대다수가 몰려 있고 양극단으로 갈수록 빈도가 줄어드는 종 모양의 분포 형태를 지닌다.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서구 국가에서 온 백인들이 자기 나라에서도 좋은 직장을 다니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었는데 구태여 그걸 버리고 우리나라까지 와서 영어 강사를 하며 살고 있을까? 그와 달리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그랬듯이 우리나라의 열악한 환경을 박차고 선진국에 진출해 돈을 벌거나 학업에 매진한 결과 오늘날 우리가 이만한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면, 지금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아마도 훨씬 더 진취적이고 유전적으로도 탁월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백인들이 대체로 정규분포 곡선의 왼쪽에 분포한다면 나는 비록 피부색은 다소 검을지 몰라도 그들의 다른 유전적 성향은 곡선의 오른쪽, 즉 평균 이상일 것으로 예측한다. 63p
2021년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68차 유엔무역개발회의는 우리나라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상향한다고 발표했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상승한 것은 유엔무역개발회의가 설립된 1964년 이래 최초이자 국제사회가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인정한다는 공식 선언이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니라 선도자다, 73p
개인적인 창의성은 주로 홀로 있으며 몰입할 때 나타난다. 황동규 시인은 외로움과 ‘홀로움’을 구별한다. 그는 ‘홀로움’을 ‘환해진 외로움’이라고 묘사한다. 스스로 선택한 혼자 있음은 사무치는 외로움이 아니라 혼자서도 충만한 ‘홀로움’이다. ‘홀로움’은 말하자면 ‘자발적 외로움’이다. 자발적이고 철저한 자기 시간 확보가 창의성과 생산성을 담보한다. 75p
나는 미국 어느 인디언 보호 구역의 학교에 새로 부임한 백인 교사의 일화를 늘 가슴에 품고 산다. 시험을 시작하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홀연 둥그렇게 둘러앉더란다. 시험을 봐야 하니 서로 떨어져 앉으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어리두절해하며 이렇게 말하더란다. “저희들은 어른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라고 배웠는데요.” 우리 중에는 철저하게 혼자 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늘 여럿이 함께 일한다. 대학의 문을 나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거의 모두 협업 현장에 던져지건만 학교 체제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철저하게 홀로서기만 배운다. 85p
나는 다른 인터뷰 프로그램보다 그가 진행하는 <나이트라인>에 나온 사람들은 왜 한결같이 말을 잘하고 귀 기울여 듣게 만들까 생각하다 그의 진행방식이 남다름을 깨달았다. 그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 뭔가 중요한 지문을 할 때 바로 들이대지 않는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고 알려준 다음 다른 사람에게 지극히 단순한, 그래서 별 준비 없이 편안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먼저 던져준다. 그 사람이 답변하는 동안 할 얘기를 충분히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매우 현명한 기법이다. 99p
이런 관행을 깨기 위해 나는 모든 발제를 오전으로 몰아 점심시간 전에 해치우고 식사 후에는 줄잡아 네 시간 정도에 걸친 멈춤 없는 숙론을 진행했다. 나는 의자들이 붙박이로 박혀 있는 방보다는 의자를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넓은 방을 선호한다. 원할한 숙론을 위해 의자들을 동심원 형태로 배열한다. 맨 안쪽 동심원에는 발제자와 토론자를 중심으로 핵심 멤버들을 앉게 하고, 그 다음 원에는 그 주제에 관해 전문성을 지닌 학자들을 주로 배치한 다음, 바깥 원은 학생들이나 자발적으로 참여한 일반인들에게 주어진다. 의자는 조금씩 어긋나게 배치해 모두 가운데를 볼 수 있게 하고 잠깐 외부로 나가야 할 때도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고 틈새로 드나들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서너 시간 대화를 나누면 참여자 대부분은 대체로 발언할 기회를 충분히 얻는다. 110-111p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수업 내용에 관해 2,000자 분량의 에세이를 작성해 제출하라고 요청한다. 원고지 10매는 얼추 일간신문 시론의 길이로서 대중을 설득하는 데 가장 적절한 분량이다. 학생들 중 누군가는 훗날 탁월한 논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미리 훈련한다는 의미로 요청한다. 내 강의는 놔두고 초청 강사의 강의에 관해서만 수강한 다음 날 자정 전까지 간단한 강의 내용 요약과 거기서 얻은 지식 및 교훈에 대한 본인의 느낌을 서술해 제출하도록 한다. 117p
싸우십시오. 위원장 눈치 따위는 볼 것 없습니다. 어차피 저한테 발언권을 구하지 않으신 지 오랩니다. 싸우십시오. 다만 한 가지만 지켜주십시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혹은 대표하는 기관의 이익을 위해서 발언하지 마시고 오로지 어떻게 하면 저 불쌍한 아이를 하루라도 빨리 안전하게 바다로 돌려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논의해주십시오. 이 원칙에 어긋나는 발언은 위원장의 권한으로 가차없이 저지하겠습니다. 129p
우리 사회에 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 중에서 내가 가장 절묘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 “정부는 정책을 만들고 국민은 대책을 만든다.” 정부가 무슨 정책을 내놓든 그저 30분이면 초토화된다. 인터넷에는 비판이 넘쳐나고 정책의 영향을 입을 당사자들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처음부터 이해관계에 얽힌 모든 시민과 던체의 대표들이 마주 앉아야 한다. 비록 과정은 지난하고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덜하다. 우리 사회의 모든 일이 전부 다 대의민주제 방식을 따를 필요도 없고 그게 언제나 효율적이지도 않다. 큰 틀에서는 대의민주제를 행하지만 그때그때 적절하게 직접민주제를 가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37p
시나리오 사고의 성공은 다양한 목소리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종합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몽플뢰르 콘퍼런스의 성공 요인 역시 다양하고 다분히 적대적 이해관계를 지닌 참가자들이 대화 원칙을 세우고 그를 철저하게 지켰다는 데 있다. 그들은 우선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가 ‘원하는’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기를 원칙으로 정했다. 또한 ‘이러이러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다’라든가 ‘이러이러한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와 같이 단정적 어법은 금할 것을 약속하고 지켰다. 그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만 논의하도록 권장했고 그대로 따랐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든가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등의 질문만 가능하도록 하여.. 151p
나는 위원장의 권한을 사용하여 기획소위원회를 따로 구성했다. 각 분과에서 사용하여 두 명씩 초청하여 열 명 남짓으로 구성된 기획소위에서는 훨씬 진지한 대화가 가능했다. 기획소위에서 숙론을 거쳐 결정한 제안들은 전체 회의의 안건으로 올려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쳤다. 163p
제한된 시간 내에 어떻게든 합의를 도출해내야 하는 위원회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쾌적한 공간을 피하는 게 좋다. 비교적 좁은 공간에서 상대방의 눈을 직시하고 어쩌면 숨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까이 앉는 게 효율적이다. 177p
학생들에게 칼 세이건의 이 말을 들려줘도 좋을 것이다. “질문에는 순진한 질문, 지루한 질문, 부적절하게 들리는 질문, 지나친 자기비판을 앞세운 질문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은 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 세상에 멍청한 질문이란 없다.” 엑스x 팔로워가 300만 명이 넘는 필리핀의 방송인 라몬 버티스타는 더 간단하게 마무리했다. “진짜 멍청한 질문은 묻지 않은 질문이다.” 180p
대담이나 숙론의 목적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지혜를 보다 많이 이끌어내 주어진 이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공감대를 넓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자면 참여자들이 자기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 여유을 마련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카펄은 아무리 그 분야의 전문가라도 그냥 불쑥 들이대지 않고 곧 이러이러한 질문을 하겠다고 언질을 준 다음 다른 참여자들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지며 잠시라도 시간을 확보해줘 발언을 준비할 수 있게 해준다. 188p
숙론이 생각만큼 잘 굴러가지 않으면 무조건 작은 모둠으로 쪼개라는 가르침은 나는 물론 그때 함께 참여한 대학원생 모두에게 평생토록 써먹을 유용한 배움이었으리라 확신한다. 왠지 모르게 겉도는 숙론 모듬을 너댓 명 단위의 작은 모둠으로 나눠 단 10~30분이라도 따로 모였다가 다시 모이면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살아난다. 작은 모둠으로 나누면 거의 모든 참여자가 발언 기회를 얻고 일단 한번 얘기해본 주제에 대해서는 아무리 참여자 수가 늘어나도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발언하게 된다. 작은 모둠에서는 대개 전체로 다시 모였을 때 자신들을 대표해 숙론 내용을 발표할 대표보고자를 선임한다. 이런 ‘헤쳐 모여’식 숙론을 해보면 물론 대표보고자가 보고를 하더라도 다른 참여자들도 놀랍도록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한다. 194p
접촉으로 촉발된 앎의 과정이 사회적 움직임으로 이어지려면 시민들이 한데 모여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브레흐만은 <휴먼카인드>에서 시민 참여형 정치가 고사 직전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살릴 수 있는지 보여준다. 베네수엘라의 소도시 토레스와 브라질의 대도시 포르투알레그리는 엄청난 규모의 시 예산을 시민 자율에 맡긴다. 토레스는 해마다 연초에 1만 5,000명의 시민이 시내 560곳에서 위원회를 열고 에산 배정에 대해 숙론한다. 1989년 포르투알레그리시는 예산의 4분의 1을 시민 참여 방식으로 집행했다. 브레흐만은 이 놀랍도록 단순한 방법이 현대 민주주의의 고질적 병폐들을 깔끔히 해결해주건만 주요 언론들이 보도하지 않아 폭넓게 알려지지 않는다고 탄식한다. 시민 참여형 정치 형태는 우선 거의 모든 민주국가에 만연하 냉소주의를 해소해준다. 토레스와 포르투알레그리에서는 거의 모든 시민이 저이인과 개인적 친분이 있다. 매년 시민의 약 20퍼센트가 예산 편성 과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을 직접 만난 적이 있고 정치인들은 그들의 애로 사항도 웬만큼 알고 있다. 시민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양극화에서 신뢰로, 배제가 포함으로, 안주에서 벗어나 시민권 확립으로, 부패가 투명성으로, 이기심이 연대로, 그리고 불평등이 자존감으로 변해 갔다.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일수록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 204p